2014년 4월 16일 여객선 세월호가 서해에서 전복되어 30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한국 법원은 선장과 선원을 유죄로 판결했다.
다른 이름: 세월호 참사 · 2014년 4월 16일
인천–제주 항로의 청해진해운 여객선 세월호는 2014년 4월 16일 아침 서해 진도 맹골수도 부근에서 기울어 전복되었다. 탑승 476명 중 172명이 구조되었다. 법원과 정부는 304명을 사망 또는 실종으로 다루었고, 그중 대다수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수학여행 학생과 교사였다. 이 페이지는 갇힌 선실을 묘사하지 않는다.
조사는 불법 증개축, 과적, 부족한 평형수, 객실 방송이 대기하라고 하는 동안 선원이 먼저 떠난 사실을 확인했다. 이준석 선장은 2014년 11월 업무상 과실로 징역 36년을 선고받았다. 광주고등법원은 2015년 4월 유기치사로 바꿔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2015년 11월 12일 그 형을 확정했다.
선체는 2017년 3월 23일 인양되었다. 특별법은 조사 위원회와, 박근혜 정부 이후에도 이어진 추모 정치를 만들었다. 이 파일은 외국 통신의 재난 스케치가 아니라 한국 법정과 한국 공적 기억의 사건이다.
날짜2014년 4월 16일
사망304명 사망·실종
탑승승객·승무원 476명
운항사청해진해운
선장무기징역, 2015
선체2017년 3월 인양
도감 점수
악명 82
미스터리 35
규모 80
증거 75
법적 파급 78
문화 70
악명
82
미스터리
35
규모
80
증거
75
법적 파급
78
문화
70
여객선, 대기 방송, 법정
세월호는 선교에 대한 닫힌 형사 사건이며, 규제 당국·선사·구조 첫 시간에 대한 아직 열린 논쟁이다.
국내 항로의 개조된 배
선체는 1994년 일본에서 페리 나미노에로 건조되었다. 청해진해운이 2012–13년 사들여 세월호로 개조하며 갑판을 늘리고 복원성을 바꿨다. 한국 조사 기관은 뒤에, 그 개조와 화물 관행이 맹골수도에서 선회할 때 여유를 너무 작게 남겼다고 보았다.
2014년 4월 15일 밤 배는 인천을 늦게 떠났다. 화물은 뒤에 결박이 부족하고 허가 적재를 넘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평형수는 모자랐다. 기상만이 원인이라는 설명은 한국 법정 파일의 중심에 있지 않다.
4월 16일 아침
8시 30분 이후 배는 선회하다 기울었고 바로잡지 못했다. 객실 스피커는 승객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선장과 일부 선원이 배를 떠났다. 해경과 민간 선박이 물과 열린 갑판에서 172명을 건졌다. 안에 남은 사람 대부분은 제때 닿지 못했다.
사망·실종 304명 중 250명이 단원고등학교 학생이었다. 그 사실은 선원 재판에서 가중 사유가 되었고, 특별조사법을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안산과 유가족의 이름이 이 파일의 도덕적 중심이다.
법정, 선주, 국가
선원 14명이 실형을 받았다. 퇴선 명령 없이 도주한 이준석의 유기치사 무기징역이 형사 결과의 정점이다. 청해진해운과 관련 회사는 별도 절차를 밟았다. 경찰이 추적한 실소유 인물 유병언은 2014년 6월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신원이 7월에 발표되었다.
규제 당국과 해경 간부는 해임되거나 관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사퇴 의사를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개 대응에 대한 이른바 7시간은 그 자체로 정치 파일이 되었고, 2016–17년 탄핵 논쟁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다만 전복의 기술적 원인은 대통령의 행위가 아니다.
특별법과 인양된 선체
2014년 세월호특별법은 유가족 중심의 조사 틀을 만들었다. 뒤의 위원회들은 국가 책임을 어디까지 추궁할지를 두고 갈라졌다. 2017년 3월 인양은 남은 실종자를 찾고 배 자체를 증거로 읽겠다는 약속으로 제시되었다.
세월호 이후 안전법은 국내 여객선 검사, 화물 신고, 퇴선 의무를 강화했다. 그 규칙이 모든 연안 항로에서 관행을 바꿨는지는 별도의 준수 문제이다. 선장에 대한 형사 사건은 열려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