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칸일수록 이 직업에서 해당 지표가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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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답
세월호는 언제 침몰했나?
여객선은 2014년 4월 16일 아침 진도 인근 서해, 인천–제주 항로에서 기울어 전복되었다. 전날 밤 인천을 출발했다.
몇 명이 사망했나?
재판에 쓰인 공식 집계는 탑승 476명 중 304명 사망 또는 실종, 구조 172명이다. 사망자 중 약 250명이 단원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초기 수색의 수습·실종 숫자는 인양이 이어지며 한 자릿수씩 바뀌었다.
누가 유죄 판결을 받았나?
이준석 선장은 유기치사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은 2015년 11월 12일 확정했다. 다른 선원은 최종 상고 경로에서 약 1년 6개월에서 12년의 형을 받았다. 일부 해경·규제 당국자는 별도로 유죄 판결을 받거나 해임되었다.
전복 원인은 무엇인가?
법원과 조사 기구는 급선회, 과적과 부실 고박, 증개축 이후 떨어진 복원성, 부족한 평형수의 결합을 지적했다. 전시 행위도, 설명되지 않는 단일 구멍도 아니다.
승객은 왜 안에 머물렀나?
반복된 방송이 기다리라고 했다. 선장은 제때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대법원은 그 부작위와 선원의 이탈을 유기치사 인정의 핵심으로 보았다.
선체는 언제 인양되었나?
선체는 2017년 3월 23일 끌어올려진 뒤 조사와 추모를 위해 옮겨졌다. 인양은 남은 실종자를 찾고 배를 증거로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2014
통상 형사 절차가 비상 위원회와 나란히 달렸다.
외국 독자가 ‘그 조사’로 본 위원회와, 한국법이 구분한 선원 재판은 다른 트랙이다.
기관
- 한국 검찰과 법원 — 선원을 기소·재판하고 2014–15년 유기치사 경로로 무기징역을 만들었다.
- 합동 수사 — 첫 달에 화물, 증개축, 청해진 네트워크를 그렸다.
- 특별조사위원회 — 2014년 특별법 아래 국가와 기업 실패를 함께 살피도록 만들어졌고, 뒤에 정치적으로 쟁점이 되었다.
- 해양경찰과 후신 기관 — 최초 대응자이자, 개혁 이후에는 지휘 결정 자체가 조사 대상이 된 기관.
그다음에 한 일
- 구조, 이어서 수습
첫날은 구조로 프레이밍되었다. 몇 시간 안에 수습과 신원 확인 작전이 되었다.
- 회사 파일 압수
선체가 수도에 있는 동안 적재 서류, 개조 허가, 선주 연결이 끌어올려졌다.
- 선원을 먼저 재판
검찰은 먼 선주가 아니라 배를 떠난 사람들을 앞세웠다.
- 죄명을 올리다
2015년 항소심은 과실만이 아니라 유기치사를 받아들였다.
- 특별조사를 입법
특별법은 통상 부처 보고를 믿지 못한 유가족에게 답했다.
- 전시를 끌어올리다
2017년 인양은 배를 증거이자 남은 실종자에 대한 약속으로 다루었다.
전환점
- 대기 방송 — 방송이 공개된 뒤, 선원의 이탈은 혼란만으로 서술될 수 없었다.
- 2015년 4월 유기치사 판결 — 항소심이 선장 범죄의 법적 이름을 바꿨다.
- 2017년 3월 인양 — 끌어올린 선체가 한국 기억의 ‘배는 아직 바다에 있다’ 국면을 닫았다.
조사는 유죄를 만들었다. 모든 국가 부작위의 단일한 무쟁점 지도를 만들지는 못했다.
공개 기록 백과입니다. 법률 자문이 아니며 범행 방법이 아닙니다. 잔혹한 묘사는 넣지 않습니다. 전쟁은 별도 아틀라스에서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