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 정기적으로 수술을 제공하기 전, 방광 결석을 몇 분 만에 마취 없이 제거하던 "돌 자르는 사람"들은 마을을 옮겨 다니며, 때로는 유료 관객 앞에서 잔혹한 시술을 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인 프랑스 수도사 프레르 자크 보리외는 1690년경부터 1719년경까지 5,000건이 넘는 시술을 했다. 병원 기반의 정규 수련 외과의사와 결국 더 안전한 기법이 등장하면서 이 직업은 사라졌다.
떠돌이 결석 제거사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이 일을 없앴고, 그 자리를 어느 직업이 가져갔는지 정리했다.
이발사-외과의의 유럽
라틴 기독교 세계의 대학들은 의사에게 이론과 진단을 가르쳤지만 피 묻히는 일은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혈, 발치, 절단 같은 실제 절개 작업은 이미 날카로운 칼과 안정된 손을 가진 이발사들의 몫이 되었다. 중세 수 세기에 걸쳐 길드가 이 기술을 서서히 조직했고, 지역 이발사-외과의 조합에서 1540년 런던의 이발사-외과의 조합에 이르렀다. 한편 이슬람 세계의 병원과 번역된 그리스 의학 문헌은 유럽보다 더 통일되고 종종 더 앞선 수준의 외과 지식을 유지했다.
같은 시기에 벌어진 일
토리노 공방전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던 프랑스 군의관 앙브루아즈 파레는 총상 소작에 쓰던 끓는 기름이 떨어지자 나머지 환자들을 달걀노른자, 장미 오일, 테레빈유로 대신 처치했다. 최악을 예상하며 다음 날 아침 확인했을 때, 기름으로 치료받은 병사들은 고통스러워하는 반면 나머지는 편안히 쉬고 있었고, 이후 그는 뜨거운 기름을 이용한 소작법을 완전히 버렸다.
런던 세인트 조지 병원에서 존 헌터는 마부의 오금 동맥류를, 흔히 치명적이었던 표준 치료법인 절단 대신 손상 부위 훨씬 위쪽에서 동맥을 네 개의 결찰사로 묶어 치료했다. 환자는 6주 후 퇴원해 다시 마차를 몰았고, 이 "헌터식 결찰술"은 한 세기 넘게 표준 치료법으로 남았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수술실에서 치과의사 윌리엄 모튼이 흡입 마취제 에테르를 환자에게 투여하는 동안 외과의사 존 콜린스 워런이 턱의 종양을 제거했다. 워런은 놀란 청중을 향해 "여러분, 이것은 속임수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며, 무통 수술 소식은 몇 주 만에 유럽까지 전해졌다.
루이 파스퇴르의 세균설을 접한 조지프 리스터는 글래스고 왕립병원에서 상처를 석탄산으로 소독하기 시작했고, 치명적 상처 패혈증이 극적으로 감소했다는 결과를 랜싯지에 발표했다. 일부 외과의사가 경험의 훈장인 양 과거 환자의 마른 핏자국이 굳은 가운을 입고 수술을 계속할 만큼 처음엔 조롱받았지만, 그의 방법은 20년 안에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